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후지모토 겐지 (문단 편집) === 김정일의 요리사 === 이후 본격적으로 김정일의 요리사 겸 측근이 되어 그의 사생활을 수행하게 된다. 김정일의 요리를 만들어줌은 물론 김정일의 연회, 골프, 승마, 낚시, 사냥, 수상스키, 오토바이 경주 등 각종 취미를 참관하며 일본 경험을 바탕으로 조언이나 평가를 내려주었다. 초기엔 눈치 없이 김정일과의 경주에서 김정일을 이겨 화나게 한다거나, 1992년 수첩에 '이런 사회주의 나라는 정말 싫다'라는 낙서를 했다가 리명제 부부장에게 들켜서 김정일에게 보고하겠다고 화를 내는 통에 경을 치기도 했다. 이때 그냥 혼자 화풀이하는 수단이라면서 리명제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울며 빌어서 겨우 넘어갔지만 10년 치의 일기를 모두 압수당했다. 그외에도 상당히 기묘한 광경을 보게 되는데, 김정일이 승마를 하다가 낙마해 기절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김정일은 치료하는 과정에서 마약성 진통제를 맞으며 자신의 측근들에게 모두 맞게 했다. 이는 김정일이 혼자서 마약에 중독되기 싫다고 한 짓이었는데 당연히 치료용으로 놓는 주사 정도로 중독될리는 없었다고.[* 학자들은 김정일이 중독 운운한 것은 핑계고 암살을 두려워해서 이랬을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1996년 즈음부터는 [[김정철]], [[김정은]] 등 김정일의 아들들의 놀이 상대도 되어 주었다. 김정일 외의 엘리트로는 정무원 외교부장, 국제비서를 지낸 [[허담]], 서기실의 [[김창선(북한)|김창선]] 등과 친했다고 한다. 후지모토는 김정일의 상당한 신뢰를 받게 되어 1990년에 조선로동당 입당이 허용, 박철이라는 조선 이름을 받았으며, 김정일에게서 금반지를 하사받고 '10년 후(2000년)에 만나서 술 먹자'라고 했다고 한다. 밀레니엄 반지였던 셈인데, 막상 2000년을 앞둔 시점에서는 그들 중 세 명이 숙청에 두 명은 병사, 한 명은 체포 상태였다고.1991년 김정일의 최고사령관 취임 기념 사진 촬영 때도 후지모토가 동석할 정도였다. 이러한 신임을 바탕으로 후지모토는 로열 패밀리를 관찰하면서 훗날 그의 이름을 알리게 되는 고급 정보들을 입수하게 되는데, 다름아닌 김정일의 아들들에 관한 것이 그중 하나다. 후지모토는 한번도 김정일이 측근들을 불러 모으는 중요한 자리에 김정남을 부른 적이 없으며 북한에 있을때 김정남의 존재조차 몰랐을 정도로 그가 비중이 없다면서 [[김정은]]이 김정일의 후계자가 될 것을 미리 예측해서 저서에 밝히기도 했다. 당시 글 내용을 보면 차남인 김정철은 지나치게 유약하고 여성스러워 김정일이 탐탁치않게 생각했으나, 막내 김정은은 어린 나이에도 후지모토에게 당당히 지시를 하고 농구시합 때에도 명령을 하는 등 리더스러운 면모가 보인다고 평가했다. 이때는 김정은이 후계자는 커녕 그 존재조차 북한 밖에 잘 알려져있지 않았을 때였기 때문에 비교적 정확, 최소한 본인의 생각엔 솔직한 평가라고 봐도 될 것이다. 당시에는 중앙위원회 부부장 출신 탈북자 [[박병엽]]이 후계자는 확실히 김정남으로 조직지도부나 군에서 일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으며 고용희는 김정일과 아무런 관계도 없다는 주장을 하며 김정남 해외 유학설, 고용희와 김정일 부부설 등을 주장한 [[이한영]]이 가짜라고 주장하기도 했으나 이제와선 이한영, 후지모토 겐지의 주장이 정확한 것으로 드러났다. 특히 김정은이 후계자로 떠오르면서 몸값이 상당히 올라 여기저기 세계 각국의 언론이나 학자들로부터 인터뷰 제의가 많이 들어와 2009~2010년대 초반 사이에 다큐멘터리나 특집 방송에 꽤 많이 나왔고 북한 관련 다큐멘터리 제작 때 김씨 일가, 특히 김정일 개인에 집중하는 다큐멘터리다 싶으면 이 사람이 매우 높은 확률로 등장했다. 하지만 위에 문단에 언급된 주변 사람들의 증언들과 그를 인터뷰한 기자들이 그의 허풍등을 간파하고 관심이 많이 떨어졌었다. 이 시기는 후지모토는 신나게 지냈는데, 김정일의 특별 허가를 받고 마카오로 놀러가서 도박을 실컷 즐기다 오기도 했고, 김정일의 요리를 만든다는 빌미로 세계 각국을 뻔질나게 오갔으며 그때마다 김정일이 만족을 표하며 금일봉이나 상도 많이 내렸다. 한번은 초대소에 놀러갔다가 급히 평양으로 소환되는 바람에 객실을 청소할 틈도 없이 나서야 했는데, 그 다음 투숙객이었던 부부장 김충일이 객실이 개판인걸 보고 중앙에 보고하여 하마터면 혁명화를 당할 처지에 놓였지만 김정일이 편의를 봐주어 6개월간 평양 지남체육관에서 초밥을 만드는 것으로 해결되었다. 이 시기 후지모토의 행적은 상당히 흥미로운데, 스스로를 '정치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요리사'라고 정의하는 사람이 김정일의 총애를 통해 북한 권력의 핵심에 접근하고, 그 권력에 의해 주어진 호화로운 삶[* 요리사로서 김정일을 따라다니며 각종 호화로운 레저를 즐긴다거나, 벤츠를 선물 받고 고속도로에서 시속 160KM에 이르는 질주를 즐긴 이후 ‘자신이 일본에서 평생을 초밥 요리사로 일했다고 이런 차를 몰아볼 수 있었겠느냐’고 기뻐하는 등 사실상 김정일 정권에 의해 주어진 혜택을 꽤나 즐겼던 것이 거의 확실하다.]에 만족하여 아내와 이혼하고 북한 여성과 결혼하는 등 사실상 북한에 영주 하려는 모습을 보였으며, 김정일이라는 권력자가 자신의 요리 실력을 매번 극찬하면서 총애하는 것을 두고 남자는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죽는다는 일본 속담을 인용하는 등 일종의 사무라이적인 충성 정도를 바치며 뿌듯해하는 모습을 엿볼 수 있다. 1994년, 김일성이 사망했을 때는 장례식 참가도 허용되어 조선중앙텔레비죤 화면에 서기실 부원 자격으로 조문하는 후지모토가 스쳐지나갈 정도였다. 하지만 생방송 때는 나왔는데 녹화방송 때는 후지모토의 모습이 지워졌다. 나중에 태영호 등이 김정일 서기실에 대해서 증언하면서 뒤늦게 달려졌지만, 서기실은 그야말로 북한 권력의 숨겨진 중핵으로, 김정일의 이목구비, 수족을 담당하는 기관이었다. 그런 서기실의 부원이 됐으니만큼 겐지도 단순히 물질적 풍요를 누릴 뿐만 아니라 개인적인 위세도 좀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소련 대사, 대외정보조사부장을 지낸 권희경이 김정일 앞에서 불손하게 앉아있자 후지모토가 장군님 앞에서 그러면 안된다고 자세 고치라고 훈계한 적도 있다고 회고할 정도다. 하지만 '손님'의 입장이었을 때는 헐겁고 유화적이던 감시와 억압 체계가[*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KAL기 폭파사건]]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때 고영희가 '우리가 한 일이 아니다. 무슨 나쁜 일만 있으면 다 우리가 했다고 누명을 뒤집어씌운다'라고 말하는 등, 북한 생활 초기에는 일종의 외부인으로서 함부로 건드리지도 않고 속내를 보여주지도 않는 대우를 받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내부자가 되어가면서 점차 자신을 옥죄어오자 비로소 독재권력의 공포를 깨닫고 탈출을 시도하는 모습은 '''거대하고 제한 없는 권력이 개인의 삶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에 대한 실제 사례로써 상당한 가치가 있다. 또한 후지모토 겐지가 북한에 대해 보이는 태도를 보더라도 '이런 사회주의 국가는 정말 싫다'라고 수첩에 낙서할 정도로 북한 체제의 빈곤과 잔학상, 모순을 명백히 파악했고, 자기 자신도 북한의 감시와 억압체제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못한 상황을 겪었으면서도 자신에게 개인적인 호의를 보이는 김 씨 일가의 구성원들을 호의적으로 평가하는 모습에서도 일종의 [[스톡홀름 신드롬]]과 같은 '''거대 권력 앞에 선 개인의 심리적 반응'''을 엿볼 수 있다. [youtube(NFYbPrf96uU)] 후지모토 겐지가 김정일의 요리사로 일하면서 작성한 수기에 대한 영상▲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